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커티스 르메이 (문단 편집) ==== 한반도 초토화 폭격 ==== 르메이는 본인의 지론인 "총력전 상황에서는 인민은 전쟁의 부속일 뿐이다"를 [[6.25 전쟁]]에서도 충실히 이행했다. 한국이든 북한이든 민간인이어도 적과 얽히면 학살을 시행해서라도 적의 부속이 되지 못하게 하는 전략을 펼쳤다. 명백히 적국인 북한 인민이든, 동맹국인 한국 국민이든 르메이에겐 그런 건 알 바가 아니었으며 오로지 침략자인 북괴로부터 동맹국인 한국을 지킨다는(=점령당한 영토 수복) 목적에만 충실했다. 그의 지론은 전쟁에서 무고한 민간인은 없다는 것이었고, [[일본 본토 공습]] 당시 '스즈키네는 군용 볼트를 만들고 옆집 하루노보네는 군용 너트를 만드는 것 뿐이다.'라는 말이 그의 사상을 대표하기로 널리 유명하다. 전쟁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도 여기까지는 대체로 잘 알고 있지만, 사실 그가 '''[[6.25 전쟁]]에서 [[한국인|김씨네와 옆집 박씨네]]에 대해서도 그렇게 [[민간인 학살|생각했다는 사실]]'''은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1950년 당시 한반도는 일본으로부터 독립한 지 5년 밖에 지나지 않은 시기였으니 일본 본토와 지역 구조가 다르면 얼마나 달랐겠는가. 실제로도 당시 일본처럼 공업지대와 민간인 거주 구역이 그렇게 구별되어 있지 않은 가내수공업 형태였다. 당시 [[미합중국 공군|미 공군]]에게는 지상에 있는 민간인들을 하늘에서 피아식별할 수단이 거의 없었는데, '''인민군이 민간인으로 위장하고 민간인들과 함께 움직였기 때문'''에[* 자기네 전투원들을 관련없는 일반 민간인들과 구분 안 하는 건 기본이고 일반 민간인들 사이로 일부러 섞여서 피아식별을 못 하게 만들고 비전투원과 전투원을 따로 구분 안 하는 행동을 반정부세력일 때부터 했었기 때문에 정부나 [[반공|그와 반대인 성향]]을 가진 세력이 이쪽 성향 세력과 싸우는 건 너무나도 힘든 일이었다. 말이 좋아 인민 속으로 들어가서 투쟁이지 사실은 자기네들이 안 잡히려고 일반 민간인들을 총알받이로 내세운 것이다. 세력이 없으니 선전선동을 하여 일반 민간인들이 자기들과 연대를 맺도록 세뇌한 건 덤.], 르메이는 '''민간인 무리를 무차별, 무조건 공습하는 지침을 내렸다.''' 그나마 초기에는 북한이 점거한 동맹국 한국의 영토에서는 별다른 초토화 폭격을 행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르메이의 "총력전 상황에서 전쟁 부속인 인민은 [[알 게 뭐야|알 바 아니고]], 존망 위기인 국가 자체를 살리는 데만 집중해야 한다."는 지론을 철저히 따랐기 때문이었다. 인민군이 점거한 한국 영토는 '''수복해야 하는 동맹국 영토'''이기 때문에 초토화 하지 않은 것이다. 좀 더 정확히는, 당시 한반도는 북부지역에 공업시설이 몰려있고, 한국은 상대적으로 전략폭격으로 지워야할 의미있는 공업시설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피해간 것이다. 이 때문에 [[인천상륙작전]] 전 낙동강 전선까지 밀려 북한에 넘어가 인민군들이 바글바글했던 지대는 1950년 융단폭격의 희생양이 되었다. [[한국전쟁기 미군의 폭격]] 문서 참조. 하지만 수복하거나 점령했던 영토를 중공군이 개입하며 다시 상실하자 르메이는 점령지든 수복 영토이든 따지지 않고 중공군이 점령하기 전에 무차별, 무조건 초토화 전략 폭격으로 싸그리 갈아 엎었다. 이런 와중에서 민간인 피해는 철저히 무시하였으며, 오히려 '''동맹국을 위협하는 적이 활용할 여지가 없도록''' 잠시 점령했던 북한 지역을 포함해서 [[1.4 후퇴]] 당시 중공군에게 내줘야 했던 한국 지역 건물과 민간인들을 '''완벽하게''' 초토화했다. 한국 국방부나 한국군에서 내는 자료에서는 한미동맹이나 한미관계를 고려했는지 대충 북한만 폭격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서울 근교 시설과 민간인들도 대거 유엔군 폭격으로 떼죽음을 맞았다. 아래의 증언과 자료들이 이를 뒷받침한다. 중공군이 개입하기 이전까지만 해도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은 미국의 동맹국인 대한민국에서 무단으로 영토를 점거하고 있는 괴뢰 집단을 영구히 없애버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찬 분위기였으나 중공군이 개입하며 이 희망은 완전히 박살나고 말았다. 르메이는 양상이 이렇게 되자 즉시 최소한의 목표인 동맹국의 군사적 안전을 위해 [[청야전술|적이 가져갈 기반을 싸그리 없애버리자]]는 극도로 냉혹하고 치밀한 계산을 한 것. 당시 UN군은 패닉 상태에 가까웠기 때문에 르메이의 폭주를 통제할 여력이 없었으며 그의 계획은 즉각 실행에 옮겨졌다. 이 여파로 북한은 물론 한국의 기반이 죄다 파괴되고 한반도의 수많은 민간인들이 불지옥에서 비명횡사하였으나 전략 자체는 제대로 먹혀들어가 북한과 중공군은 생각보다 빠르게 [[공세종말점]]을 맞았고, 전선은 국지전으로 바뀌어 교착 상태로 빠졌다. 이후 전열을 가다듬고 현재의 휴전선 근처에서 국지전으로 변한 다음에 결국 휴전을 맺은 것이다. > ([[6.25 전쟁]]) 우리는 '''인구의 20%를 죽였다.''' >we killed off … 20 percent of the population >----- >커티스 르메이 [[https://theintercept.com/2017/05/03/why-do-north-koreans-hate-us-one-reason-they-remember-the-korean-war/|#]] >우리는 한국의 북쪽에서도, 남쪽에서도 모든 도시를 불태웠다. 우리는 100만 이상의 민간인을 죽이고 수백만 이상을 집에서 내쫓았다.[* 신이치,190 출처: 아라이 신이치, 《공습의 역사 ― 끝나지 않는 대량 학살》, 이와나미 신서, p190] >'''르메이는 자신의 경험에 기초하여 미래 전쟁 과정에서 전략항공력의 중요성에 대해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그는 이 같은 확신 속에 놀라울 정도로 빨리 자신의 업무를 추진해 나갔다'''. 그는 짧은 기간 동안 전략공군 비행사들의 훈련 과정을 체계화했고, 극동지역에서 함께 일했던 동료들을 불러 모아 전략공군의 중요성에 대한 홍보와 함께 조직의 체계화를 꾀했다. '''르메이가 불러들인 인물 중에는 2차대전기 그의 휘하에서 일본 폭격을 주도한 오도넬도 포함되어 있었다. 오도넬은 한국전쟁기 최초의 극동 공군 폭격기 사령관으로서 북한 지역 폭격을 주도했던 인물이다.''' >---- >김태우, 한국전쟁기 미 공군의 공중폭격에 관한 연구, 학위논문(박사)-- 서울대학교 대학원 : 국사학과 2008, 42-43 >민간인 보호와 대량파괴라는 상반된 가치의 공존과 갈등은 한국전쟁에서도 단적으로 표출되었다. 한국전쟁 발발과 동시에 유엔군의 집행대리인인 미국은 북한지역 폭격 시 군사 산업 목표만을 선별적으로 '정밀 폭격'해야 한다는 정책을 공식화했다. 그리고 워싱턴의 정,군 최고 지도자들은 이 같은 정책의 엄격한 준수를 유엔군사령관에게 명령했다. > >그러나 '''극동지역의 공군 사령관들과 조종사들은 워싱턴의 여러 제한 조치들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전쟁 발발과 동시에 극동 공군 폭격기 사령관으로 부임한 '''오도넬은 맥아더와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북한의 인구 밀집지역에 대한 소이탄 투하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오도넬의 주장은 2차대전 후 전략폭격의 강화를 주도했던 전략공군사령관 르메이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 >위의 책, 43 >'''전략공군사령관 르메이는 소이탄 사용을 통해 북한 내 목표지역은 효과적으로 파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폭격기 사령부는 소이탄 공습으로 주요 산업 목표를 파괴함과 동시에 해당 지역을 완전히 전소시킬 수 있었다'''. 전략공군 사령부는 자신의 계획을 보다 구체화했다. 전략공군은 폭격기 사령부의 B-29rl 2대가 1조의 편대를 이루어, 1대는 목표지역에 소이탄을 투하하고 다른 1대는 산업시설에 정밀 공격을 가하기 위해 과열 폭탄을 투하하도록 했다. 전략공군은 이 계획을 폭격기 사령관 오도넬에게 송부하여 극동군 사령관의 승인을 받도록 했다. >----- >위의 책, 43~44 >워싱턴은 미 공군의 북한 지역 폭격 시 국경지역 및 민간지역 폭격을 공식적으로 금지했다. > >그러나 전쟁 초기부터 북한 지역을 무차별적으로 대량 폭격하고자 하는 세력이 완전히 숨죽이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전략공군 사령관 르메이와 폭격기 사령관 오도넬은 전쟁 초기부터 소이탄을 사용한 북한 도시 지역 무차별 폭격을 주장했다. 오도넬은 맥아더와의 첫 만남에서 "북한 내 5개 산업 중심지를 불살라야 한다."고 역설했다'''. 다만 전쟁 초기 르메이나 오도넬의 주장은 여러 정치적 고려 속에서 묻히고 말았을 뿐이다. >---- >위의 책, 73 >전략공군사령관 르메이와 폭격기 사령관 오도넬은 전쟁 초기부터 B-29기의 소이탄 활용을 주장했지만, 중공군이 참전할 때까지 미 극동공군은 B-29기의 주무기로 GP폭탄만을 사용했다. >---- >위의 책, 76 >중국공산군의 압록강 도하라는 새로운 전쟁 국면에 직면하여, 1950년 11월 5일 맥아더는 기존에 없던 매우 공세적인 폭격 정책을 하달했다. 맥아더는 미 공군의 주요 사령관들에게 '''북한 민간인들이 거주하는 도시와 농촌 지역 자체를 주요 군사적 목표물로 간주'''하라고 지시했다. 도시와 농촌에 대한 폭격의 목적은 중공군과 북한군의 은신처로 활용될 가능성이 있는 '''민간 지역의 '사전 파괴''''였다. 맥아더와 미 극동공군 수뇌부는''' 추운 겨울 한반도 북부의 민가들은 모조리 불태워버림'''으로써 공산군의 휴식처와 보급 기지를 사전에 파괴하고자 했다. 맥아더는 새로운 파괴 작전의 성공을 위해 '''태평양 전쟁시기 일본 본토 공격에서 활용되었던 소이탄 폭격을 지시'''했다. 인구 밀집지역에 대한 소이탄 폭격은 2차대전 시기 영국 공군의 독일 도시 폭격이나 미 공군의 일본 본토 폭격에 비할 수 있는 사실상의 무차별 폭격이었다. 맥아더는 새로운 민간인 거주지역 파괴 작전을 '초토화 정책'이라고 명명했다. >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맥아더의 북한지역 초토화 작전 명령이 그를 향한 '''미 극동 공군 장교들의 지속적인 건의에 의해 승인'''되었다는 점이다.''' 초토화 작전을 강력히 건의한 이들은 극동공군 사령관 스트레이트 메이어, 전략공군 사령관 르메이, 폭격기 사령관 오도넬 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2차 대전 시기 미군의 극동지역 전쟁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던 인물들'''로서, 전후 전략공군의 확충에 큰 기여를 했던 사람들이었다. 한국전쟁 초기에는 전시 민간인 보호를 주장했던 미국 내 세력들이 폭격 정책 수립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지만, 전쟁이 위기에 처하자 항공력을 공세적으로 활용하길 원했던 미국 내 세력들이 자신들의 영향력을 확장하기 시작했다. > >'''초토화작전이 시작된 후 북한 지역은 그 작전명처럼 완전히 폐허로 변하기 시작했다. 1950년 11월 4일 B-29기 수십 대의 소이탄 투하는 연일 지속되었다. 1950년 11월 폭격으로만 만포진의 95%, 회령과 남시의 90%, 초산의 85% 강계 희천 삭주의 75%등이 완전 파괴되었다. 이 시기 북한지역 폭격에서 더욱 놀라운 사실은 해당 지역 주민들의 진화 작업을 방해하기 위해 소이탄 투하 후 전폭기의 기총 소사를 실시하거나 다양한 시간 간격의 시한폭탄을 소이탄과 동시에 투하했다는 것이다. 극동공군은 표현 그대로 북한 도시와 농촌의 '초토화'를 기도했다.''' >---- >위의 책,296-297 위 글에서는 북한 지역만 소개하는데 초토화 폭격은 남한 지역도 가리지 않고 포함했었다. 글을 읽어보면 정작 남한 지역이 북한에게 점령당했을 때는 네이팜 폭격이 없었다. [[1.4 후퇴]]를 하면서 중공군에게 점령당하기 전에 서울 근교에 네이팜 폭격을 한 것이다. >지상군의 후퇴에 따라 극동공군의 초토화 작전의 범위도 자연스럽게 '''남한 지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진실화해위원회의 한국전쟁기 민간인 집단 학살 조사 사례 중에는 1951년 초 미 공군의 소이탄 공격에 의한 대규모 집단 희생 사례들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주로 1951년 1월에 집중적으로 발생한 강원 · 경기 · 경북 · 충북 지역''' 폭격 피해 사례들은 사실상 1950년 11월 맥아더의 지시에 의한 초토화 작전의 남한 지역으로의 확대를 의미했다. 그중에서도 도진순에 의해 학계에 소개되어 진실화해위원회의 심도 깊은 현지조사가 실시된 경북 예천군 보문면 산성동 폭격에 대한 연구 논문과 조사 보고서, 경북 예천 · 충북 단양 · 경기 · 강원 지역 폭격 사건 조사 보고서 등은 초토화 작전의 남한 지역 확산 과정을 속속들이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꼽을만하다. >---- >김태우, 폭격, 2013, 326-327 >남한지역 초토화 작전의 진행 과정에서 볼 수 있는 중요한 서술 중 하나는 이 시기 '''폭격기 조종사들이 남한 내 작전 구역 내에서 발견되는 모든 "[[백의민족|흰옷을 입은 사람들]]"을 사실상 적으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적잖은 전폭기 임무 보고서의 적정 항목에는 '흰옷을 입은 사람들'(people in white)이 기록되어 있었고, 이 같은 지역에는 어김없이 대규모 네이팜탄 폭격이 진행되었다. 산성동 폭격의 정찰관 중 하나였던 조지 울프는 "많은 사람들이 흰 옷을 입고 있었다. 우리는 적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었다"고 증언했다. 산성동 폭격에 관여한 또 다른 정찰관 네빌은 "[[아무래도 미친 것 같아요|우리는 지상의 움직이는 모든 사람이나 물건은 아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1951년초, 미 공군은 적 점령 하의 남한 지역 민간인들을 사실상 적 병력과 동일시하고 있었다.''' >---- >같음, 329-330 >뉴욕타임즈의 종군기자 배럿(G. Barrett)은 1951년 초 경기도 한양 부근의 어느 농촌 마을을 방문한 후 다음과 같은 기사를 작성했다. > >중국군이 마을을 점령하기 3~4일전에 '''마을에 대한 네이팜탄 공격이 진행되었다. 마을 어느 곳에서도 시체가 매장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곳에는 이를 행할 사람이 전혀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우연히 1명의 늙은 여인과 마주쳤다. 그녀는 그곳에 생존한 유일한 사람인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의 가족 4명의 시신으로 가득 찬 검게 그을린 마당 안에서 몇 벌의 옷을 부여쥔 채 멍하니 서 있었다. > >'''주민들은 마을 전체와 들판에서 발견되고 사살되었다. 그들은 네이팜탄 공격을 당했을 때 취했던 자세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었다. 한 남성은 막 자전거를 타려는 참이었고, 50명의 소년과 소녀는 고아원에서 뛰놀고 있었으며, 한 가정주부는 이상하게 아무 상처도 없었다.'''[* 폭발음으로 인한 내상으로 사망한 가능성이 있다.]''' 약 200구의 시체들이 그 작은 마을에 놓여있었다.''' >---- >같음, 330 >나는 임무에서 돌아온 조종사들이 '''머리에 보따리를 이고 가는 여인을 쏘아서 [[폭사|그녀의 몸이 터지는 장면]]을 보았다고 으스대는 것'''을 보았습니다. >'''우리는 민간인들이 많은 일을 하기 때문에 그들을 공격하라고 지시받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 >Raymond Sturgeon John Darrell Sherwood, officers in flight Suits, New York: New York University press 1996, 105 이 증언을 보면 미군 조종사들이 커티스 르메이의 사상에 충실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양심의 가책으로 지시를 거부하거나 후술되어 있듯 결국 민간인을 폭격하고 [[PTSD]]에 걸린 조종사들도 많았다. 물론 원래부터 적국이었던 북한에도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북한 [[김일성]] 회고록에서는 미군 폭격으로 73개 도시가 지도에서 사라지고 평양에서는 2층 이상의 건물은 2채의 건물만 남았다고 언급하였다. 북한 인구 20%가 폭격으로 죽고 북한 22개 도시가 네이팜탄 공격을 받았는데 평양 75%가 파괴되고 흥남 시가지 85%, 원산 80%, 신의주 60%, 사리원 95%가 파괴됐다. 그래서 북한은 미국을 철저히 증오하고 전후 군사 시설이나 중요 시설을 재건할 때 폭격을 대비하여 대부분 지하화 하였다. 지금도 북한은 [[B-52]] 등 미군 폭격기 훈련을 가장 두려워한다. 그 만큼 미군 폭격은 북한 전체에게 트라우마를 안겨준 것이다. '한국전쟁의 기원' 저자로 유명한 [[브루스 커밍스]]도 마찬가지로 북한과 미국의 군사 갈등에서 이 당시 트라우마가 북한에 많이 작용했다고 주장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